말하는 방식을 바꾸면 상대방을 바꿀수 있다.

어느 그룹 총수가 그 회사가 운영하는 골프장에 들렀다.
티샷 전에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주변에 있던 관리인에게 물었다.

"이 주변에 나무를 심으면 좋겠는데, 어떤 나무가 어울릴까요?"

관리인이 잠시 머뭇거리다 소나무가 좋겠다고 대답했.
그룹 총수는 머리를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럼 소나무를 심어보시죠."



라운딩이 끝나고, 함께 운동했던 사람이 총수에게 물었다.

"그냥 소나무를 심으라고 하면 될 텐데 왜 관리인에게 의견을 물어보셨나요?"

총수는 이렇게 답했다.

"그곳에는 누구라도 소나무가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내가 시켜서 하는 것보다 스스로 의견을 내고 그것을 한다면
좀 더 기쁘게 일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그가 말투 디자인 이전에
인생을 어떻게 디자인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으로 생각된다.

더 나은 내일은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분명히 있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나 자신의 일상을 아름답게 편집하는 말투가 필요하고,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할 말을 상대방이 자연스럽게 대신하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
위의 사례에서 총수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보자.

"여기 뭐 좀 심지 않고 그동안 뭘 했어요? 가만 있어 보. 소나무가 좋겠네. 그래요. 소나무 좀 심어봐요. 이거 참, 내가 이런 것까지 말해줘야 하나?"

그렇게 했더라면 관리인은 어떤 마음으로 일을 했을까?

이후 더 나은 아이디어를 찾았다 해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총수가 통반장을 다 해먹을 텐데 조용히 있는 게 남는 거라며, 소극적인 구성원이 되었을것이다.
조직 구성원 개개인의 의견을 이끌어내려는 노력이 바로 우리가 배워야 할 말투 디자인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나를 긴장시키는 누군가의 말을 들을 줄 아는 귀가 있을까?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말을 아낌
없이 받아들이는 포용력이 있을까?
나를 때리는 말에도,
그것이 진정으로 나의 성장을 위한 것이라면 기쁘게 받아들이는 마인드가 있을까?

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나이가 들면서 함께하는 동료는 항상 위에만 존재하는게 아니라, 옆에도 아래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다양한 관계의 조직 구성원에게 함께 하는 문화를 만들려면 구성원 개개인이 주도하는 문화를 만들 수 있도록 말투를 변화시켜야 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말로, 하늘을 나는 새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을 보호하던 알을 깨고 나와야 하듯이, 인간의 성장도 마찬가지라는 의미의 유명한 문장이다.

내 일상의 아름다움도 마찬가지다. 이전의 생각이나 관, 방식 등에서 깨어날 때 비로소 더 큰 세계로 나아갈 수있다. 어떻게 깨어날 것인가?

내가 알지 못한 것들을 알고 있는 사람의 지혜를 빌릴줄 알아야 한다. 누군가의 말을 잘 듣고, 또 그것을 상대방의 관점에서 이해한 후에 비로소 말하겠다는 조심스럽고진지한 말투가 일상 속에 가득해야 한다. 지혜를 빌릴 때는 지혜를 담은 말(어휘)의 단점을 보기보다는 주된 본질에 중점을 두고 이해해야 비로소 나의 것이 된다.

내 일상의 아름다움도 마찬가지다.
이전의 생각이나 관습, 방식 등에서 깨어날 때 비로소 더 큰 세계로 나아갈 수있다.
어떻게 깨어날 것인가?

같이 고민해보자..

Posted by 목표를 가지고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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